고요한 사건
"새 학교에서의 첫날 나는, 성적에 관심 없고 목깃에 땟자국이 선명한 교복 블라우스를 다리지도 않고 입을 뿐만 아니라 교실 바닥에 침을 뱉는 절반의 아이들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낀 나머지 절반의 아이들에 나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로고의 백팩을 메고 다니고 공부에 목숨을 거는 것은 시시한 일이라는 듯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자지만 각자 집에 돌아가서는 과외수업을 받던 아이들은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간파했다. 반 아이들은 언뜻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 보였지만, 물리적 성질이 달라 합류 지점을 지난 뒤에도 각자의 흰빛과 검은빛을 유지하며 나란히 흐른다는 남아메리카의 두 강줄기처럼, 서로 섞이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일찍 집에 돌아와 봤자 혼자 있게 되는 날들에는 처음 이사 왔던 날 아버지가 내게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었던 옥상에 올라가, 사라져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손길에 따라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 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안 눈송이가 떨어져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
* 오랜만에 몇주일을 가방에 들고다니며 반복해 읽은 단편.
* 우리는 감각에 의한 경험과 즉자적인 반응으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느 시기의 사건이, 어느 장소의 기억이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이해가 되고 가슴으로 와닿았을 때의 그 심정은 쉬이 말로 형용키가 어렵다.
그 사실들이 오랜 세월 내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드리워왔을 수도 있고
무언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잊은채 덮은채 긴 시간을 살아오다 어느 순간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치는 때도 있다.
'지금 알고 있던 걸 그 때도..' 라는 후회의 감정 같은건 차라리 분명하지만,
한 찰나의 사건으로 존재했음에도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시공간을 넘어 잔향을 풍기는 그런 종류의 선체험은 몇번 찾아오지 않는다.
* 세대가 겪어온 격변의 시기, 인간의 욕망이 얽혀 회오리치는 그 가운데 주거의 문제가 있었다. 단계적인 부동산 테크를 밟아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우리 앞세대의 방식은 생에 곳곳에 흔적과 기억을 남겨놓았다. 오랜 전세기간을 거쳐 마침내 내집마련의 꿈을 이루고 거기에 학군이 결합해 세대간으로 이어지던 그 가치관은 물론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었겠지만, 필연적으로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폭압적 방식만을 강요했다. 불과 몇년만에 집이 밀리고 동네가 헐려 모든 공간의 기억과 존재양식을 포맷해버리는 이 무지막지함은 필시 모두의 의식이 머무를 무형의 안식처마저 쓸어버렸을 것이다.
* "지옥이 있다면 아마도 그저 떠올리게, 생각나게 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