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위계와 먹이사슬의 공간에서 배우는 언어 [생존의 언어] 는 전혀 다르다.

교감과 갈등을 통해 얻어진 관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채 수년이 흐르면, 글쎄.

생에서 특정 시절에 획득하지 못한 과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던가.

우선적인 언어의 한계와 관계의 파탄에 비하면 신체적인 변화, 예컨데 중장년기 이후의 호르몬 변화 따위는 사소한 것에 가깝다.

귀가 전화가 뜸해지다 사라진 이후.

이러한 두번째 역전은 그들 남은 생 전반에 착 깔린다.



운명공동체라고도 했고 요사이 시민결합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2인의 계약관계.

그것과 포유류로서의 기본적인 활동인 임신-출산-양육이라는 과정.

지속적으로 둘을 결부시키고 일련의 고착된 프로세스화하는 어떤 기제들도 불편하다.

농경제가 무너지고 개별화되는 시대에 부모공경과 부양이라는 고리타분한 당위성이 무슨 소용인가.

많은 도그마가 타파되었음에도 "애땜에 산다"는 테제는 사회전반의 물적 심적 토대를 이룬다.

분리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국가구조의 근간이기도 한 구성원의 재생산은 더이상 개인 영역으로 남겨둘 수 없다.

모든 시스템이 재생산의 유도와 지원을 바탕으로 깔아도 뭐할 판국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