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혼잣말 2016. 5. 25. 07:50


속는 쪽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런 말을 들으면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군

시대가 나빠서라고 말해 둘까

어째서 이런 것이 유행하고 있지? 라는 식의 카오스 상태를 논하고 싶다면

카오스 전의 공백이야말로 논해야 할 대상이다


공백?


칠흑이라고 해도 되겠지 그러니까 충고해두마

만약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유행하고 있을 때는 시대를 의심해라

뭔가가 위태롭다고 생각해라

그것은 시대가 칠흑에 휩싸여있다는 것이니까

             

                                               - 코요미모노가타리 中






특정 분야의 급진적인 행동주의가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급진이라 이름붙이는 것도 너무 식상한 분류이고.

난 전반적인 영역에서 그들의 뜻을 지지한다.

적어도 많은 이들처럼 애티튜드를 문제삼거나 미러링이라는 용어로 치환해버릴 순 없다.

더 오랜 저항의 상징과 안티테제로서의 위치가 있고 또 자체적인 재생산과 생태계가 구축된 대상에겐 적합치 않다.

많은 영역에서 혼자만의 동질감도 느끼고 있다.

내 위치 - 직장의 견같은 상황, 가족혼의 부담감,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울분 - 에서 할 말은 하기위한 용기는 그것과 뿌리가 다르지 않은 토양에 뻗어있다.고 생각했..


물론 안다. 싸움이 몇개 사건의 영역에서 유의미하더라도 당장 큰 변화는 없으리란걸.

(중권이는 거기에서 자본주의의 균열을 읽었다고 하나, 지금껏 그랬듯 자본주의는 자가 코딩이 가능한 인공지능이다. 스미스라는 천적이 나타나도 또다른 오류를 통해 그 오류를 무마시킨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건을 통해 발생하는 현상으로서의 움직임들이 그저 한때의 분노와 발산으로 수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하나의 88만원세대, 안녕들하십니까, 헬조선처럼 시원하게 지르고 끝날 바람의 형태가 되겠지.


과거 운동권의 영역에서도 개별의 사건에서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해내는 것은 늘 기본적인 방법론이었다.

이번도 개별의 사건에서 사회적 맥락과 체제의 모순을 발견해내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더욱 선명한 지점은, 정치적, 제도적인 부분 등 기존 운동판에서 상정하는 싸움이 주가 되지 않는다는 점.

(어쩌면 그것도 모두 다 이미 공고한 남성성에 의해 점령당한 영역이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이번은 훨씬 더 구체적인 인격과, 개개인의 켜켜이 쌓여진 소우주와의 싸움이 되고 있단 점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공감을 요구하고 상처에 대한 공유와 개개인의 인격적 회심을 갈구하는 것이다.

남성 다수의 격렬한 거부반응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일상에서 느끼던 불안과 공포에서 이제는 눈으로 확인한 실체가 된 셈이니까.

이 사건의 상징성과 양태적인 극단성 사이의 느슨한 논리적 공백을 신나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무너지는 가부장제와 더 심하게 붕괴하는 중산층 일반의 삶의 무력함이 보인다.




<곡성>의 어설픈 놀음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던 반면, <45년후> 는 정말 등골이 서늘했다.
안정된 사회의 틀에서 자라온 나같은 사람에겐 호러였겠지만, 또다른 이들에게는 시원한 해방의 청량감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왠지 믿음직한 한 사기꾼의 말처럼, 칠흑과 카오스는 그 어둠의 이면에 흐르는 변화의 전조현상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