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권이 들어선 후 이루어지는 일련의 개혁 후퇴가 가지는 대체적인 효과들과도 맞닿아 있지만.. 국보법 역시 정부, 여당의 근본적인 스탠스의 한계와 현재의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맞닿여, 대립지점을 대단히 왜곡시키는 상황을 낳고 있다. 즉, 결국은 '국보법 폐지 시도를 안한만 못한' 결과까지 이어지는 구도다.
노회찬이 합세하여 이른바 날치기 통과를 할 때까지만 해도 '폐지 운동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벌어지는 사태에서는 나도 더이상 이딴식으로 흘러가는 국보법 폐지가 가치가 있는지 회의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폐지가 된다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_-;;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대하여 - 새질서
□ 워싱턴 컨센서스
“중도 성향을 가진 2개의 정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때 구조조정이 가장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점이 워싱턴컨센서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구조조정을 실시했다면 민중들의 저항은 대단히 심각했을 것입니다. ..(중략).. 신자유주의가 민중에게 전가하는 고통은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이 군부세력임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게 인식될 것입니다. ..(중략).. 노동자 민중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개혁’으로 선전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강상구]
어떻게 보자면 윗글은 현재의 국가보안법 폐지 등 일련의 정치개혁을 둘러싼 보수, 개혁, 진보세력의 갈등을 잘 표현하는 문구일지도 모른다. 강상구 동지의 말처럼 지금과 같이 국민들의 정치 패러다임이 군사독재 시절과 질적으로 달라진 남한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돌파 방식인 신자유주의의 전도는 군화발보다는 신사화가 더 어울릴 것이고 현재 열린우리당이라는 집권세력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시늉하는 것은 신사화의 주인공이 부드러운 젠틀맨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것을 21세기 한국적 맥락 속에서의 또 하나의 워싱턴 프로세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볼 만하다.
□ 국가보안법에 의한 두 가지 모순
국가보안법은 그 시작부터 외부적인 반체제 세력으로부터 위협보다는 내부적인 반체제 세력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즉 바깥으로부터의 체제위협에는 군비증강,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한 세계자본주의 체제 편입으로 극복한 반면, 내부적인 민주화의 요구나 계급적인 모순에 대한 투쟁은 국가보안법이 상징하는 강력한 국가주도 자본주의를 신조로 삼고 있는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짓밟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탄압대상은 군사독재의 잔악함을 거부하는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심지어 보수적인 반대세력 일반을 아우르고 있었다.
① 외적 모순
그러하기에 오랜 기간 북한이 국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및 헌법 조항과 남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던 시절부터 이어지는 실제 현상과의 모순, 주체사상의 이론적 지도자라 자타가 공인하는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고 국빈 대접을 받는 모순 등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외적 모순은 편의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앞서 말했다시피 본래 국가보안법은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을 빌미로 내부의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함이었지 북한이 외국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의도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독재 정권이 끝을 맺고 민간정부가 들어선 시점, 그리고 구사회주의 국가와의 경제협력 및 남북 경제협력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은 이제 국가보안법이라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시대정신과 도저히 병행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앞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특징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제3세계에서조차 과거의 권위주의적이고 인권말살적인 통제수단을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프로세스를 이행할 수 없음을 뜻하며, 보다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북한을 남한 자본주의의 생산기지로 이용하는 데에 있어 국가보안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폐기하는 대신 테러리스트라는 새로운 보이지 않는 적들을 주적으로 하는 테러방지법으로 재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② 내적 모순
사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뒷받침하는 감성의 동력은 바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 스스로가 오랜 기간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일부,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의 상당수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이것이 시대의 모순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강력한 투쟁동력이 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좌파를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입성하고 약 17% 의 국민의 지지를 얻는 현 상황과 배치되는 국가보안법의 내적 모순이라 할 수 있다(일부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온존하는 한 마치 우리 당이 언제라도 불법화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국가보안법은 법 자체가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권력, 특히 사법 권력과 결합하여 생명력을 가져왔으며 이제 그 생명력은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그 법이 가지는 폭력성이 일반 노동관계법 등 각종 친자본적인 법률들을 통해 재해석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일례로 이제 파업노동자는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손배가압류로 쥐어짠다).
국가보안법 사범에 대한 검거현황을 보면 1998년 이후 현재까지 매년 구속인원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1998년 454명 구속, 2002년 7월 70명 구속),[2003년도 경찰청 소관 예산안 검토보고, 2002, 10] 이에 대해 경찰청은 한총련 세력의 약화, 수사대상의 감소, 국가보안법 적용의 엄격화 추세 등을 들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가지는 위력이 약화되고 자본주의 모순의 증가에 따라 여타 법을 통한 진보세력 탄압이 강화되는 양상을 띠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국가보안법 폐지 의도
자신들 또한 일정정도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국가보안법 폐지 혹은 형법보완 등을 통해 정치적 자유의 확대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보세력과 일정정도 이해관계가 일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앞서 말한바 근본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온존하고, 이것을 배경으로 낡은 반공 수구세력이 지배계급의 핵심으로 남아있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는 문제인식 때문이지 인민에게 전면적으로 정치적 사상적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대통령이 같은 입으로 노동자를 귀족노조로 몰아세우는 모순을 보라).
① 신자유주의의 강화
현재의 지배세력은 근본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완결을 통해 체제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이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프로세스를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조중동이라는 희대의 꼴통 찌라시가 정권의 역적 취급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반동논리를 경제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매일경제, 한국경제와 같은 경제지는 건전한 비판세력으로 자리매김(매경의 사장을 총리후보로 지목한 데에서 이미 정권의 성격은 노골화되었다)되는 예로도 확인할 수 있다.
현 정권이 현재 국가보안법 등 일련의 정치적 개혁입법과 같이 내놓고 있는 것들이 기업도시법, 주택법 개정, 기금관리기본법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 프로세스라는 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목메고 있는 진보세력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마시키는 효과를 갖는 동시에 정치적 개혁과 (자본을 위한) 경제적 자유화가 자웅동체임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해외 투기자본 규제 움직임, 공정거래법 개정 등은 이 과정에서 효율성 극대화의 가지치기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② 자본주도의 평화 프로세스 가동
자본에게 있어 현재의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장래의 자본주의 생산기지의 수직계열화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어느새 자본가들이 앞장서서 국가보안법 등 대북투자에 대한 장벽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도래하였다. 한나라당이라는 수구세력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이미 국가보안법이 있으나 마나한 낡은 법이며 그것이 자본의 이윤취득에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현 집권세력과는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하 간에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통한 정당성 획득으로 신자유주의 강화와 남북 긴장 완화라는 목표를 성취하고픈 신 집권세력은 궁극적으로는 북한과의 통일 프로세스를 남한 자본 주도의 흡수통일을 감안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부시 식의 을러대기는 북한의 더욱 가열찬 반발과 극단적으로는 국가의 붕괴로 이어지고, 이것은 남한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최근 상대적으로 자주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진보세력의 국가보안법 폐지 의도
① 구시대적인 인권탄압 근절
이것은 좌파 세력뿐 아니라 자유주의 세력 역시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굳이 긴 시간을 들여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② 인민주도의 평화 프로세스의 출발점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이 실질적인 파괴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가지는 시대적 상징성, 즉 냉전시대의 유물인 반공주의, 북한 적대정책, 이에 따른 군비증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평화 프로세스가 함께 제시되고 선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남한의 MD 편입을 막아내는 것과 동시에 남북한 평화적인 군축으로 이어져 통일의 초석을 다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앞서의 자본 주도의 평화 프로세스로 악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남한의 자본이 북한에 투자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과거 제1세계가 제3세계에 자국의 쇠퇴산업과 한계산업, 그리고 공해산업을 밀어내는 식의 ‘귀찮고 더럽고 어려운 것 떠넘기기’ 식의 자본투자나 금융자본의 이자놀음의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③ 혁신적인 군축을 통한 사회안전망 확충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진보세력은 앞서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취될 국방비 절감이 사회복지예산 확충 또는 생산적 투자로 이어지는 일련의 ‘평화/복지 동시 추진’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일부 좌파는 지도부의 우편향을 비판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통해 발전할 평화 군축 투쟁은 어찌 보면 부유세 신설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좌파적인 개혁이며, 이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에 따른 낡은 시대정신을 근절시키지 않는 이상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마냥 국가보안법 폐지를 자유주의자의 과제로만 남겨놓을 경우 그것은 남북 평화가 남북 인민들의 평화가 아닌 남한 자본가만의 평화로 귀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 현재 진보세력의 국보법 폐지 운동의 한계
현재의 투쟁은 성과도 많은 만큼 한계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①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강화, 자본주도의 평화 프로세스 진행을 효과적으로 타격하고 있지 못함
② 진보세력의 평화 프로세스를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있지 못함
③ 의회전술과 대중투쟁전술의 몇몇 방법론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
④ 국가보안법의 연내폐지 이후 어떻게 보수 세력의 형법보완을 막아낼 것인가에 대한 대책 미비 혹은 대당원 홍보부족
등의 문제점이 눈에 뜨인다.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입하여 실질적으로 처음 본격적으로 권력과 - 현존하는 정치권력뿐 아니라 생활세계의 거미줄 망처럼 퍼져있는 실존하는 권력 - 한판 맞장을 뜨는 투쟁이므로 이번 겨울나기는 의미가 크다. 그러함에도 그것이 가지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과 전망을 내부에서조차 효율적으로 공유하지 못함에 따라 당내 갈등이 증폭되는가 하면,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를 폭로한다고 하면서도 열린우리당에 목메고 있는 듯한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아쉬운 모습이 많다.
이에 사무총장 동지 이하 스위퍼 역할을 해야 할 일꾼들은 당장 현장에 나가 밥을 굶는 것보다는 어떻게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 내부적으로 정당성을 공유하고 외부적으로 실질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향후 평화 프로세스를 어떻게 당이 주도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고 제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