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쳐서 보습 만들라는 가르침 따랐을 뿐" [인터뷰] 한국가톨릭 병역거부 1호 고동주씨
김덕련(pedagogy) 기자
▲ 한국 가톨릭 사상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고동주씨.
ⓒ2005 오마이뉴스 김덕련
"한국 천주교 내에 기독교 평화주의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한반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어언 200여년. 지난 11일 한국 가톨릭 사상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바로 고동주(25, 가톨릭대 사회학과, 휴학 중)씨.
고씨는 입영예정일이던 지난 11일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병역거부 의사를 통보했다. 19일에는 평화네트워크 활동가였던 오정록씨와 함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마이뉴스>는 22일 오후 3시께 명동 가톨릭회관의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사무실에서 고씨를 만나 '한국가톨릭 사상 병역거부 1호'로 나선 사연을 들어보았다.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성경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주의'는 기독교 발생 초기부터 하나의 전통으로 형성됐고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또한 지난 1960년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에도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며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에게 달리 인간다운 입법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요."
자그마한 키에 맑은 눈을 지닌 가톨릭 청년 고씨는 병역 거부 선언을 하게 된 계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살상'과 '두려움'을 전파하는 군에 입대한다면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천주교 신자로서 고씨가 병역을 거부한 이유다.
고씨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큰 틀에 포함되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설명했다. 고씨가 말하는 종교적 신념은 '기독교 평화주의'다.
고씨가 택한 길은 감옥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길. 고씨가 쉽지 않은 이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정한 건 언제일까?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한 건 2003년 여름방학 때부터였어요. 가톨릭학생회에서 농촌봉사 활동을 비롯한 사회 참여 활동을 많이 하면서 군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1980년 광주항쟁 관련 자료를 보면서 우리나라 군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됐고요."
병역거부 바탕 이룬 사상은 '기독교 평화주의'
고씨가 처음부터 병역거부라는 가시 돋친 길을 택한 건 아니었다. "가톨릭의 형제애적 평등과 심하게 어긋나는 군대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불신"을 막연하게나마 지니고 있던 고씨는 병역특례 업체에 취업하고자 산업기능요원 시험 준비를 한동안 했다.
그러나 고씨는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마음의 평안 대신 "내가 너무 피하려고만 하는 건 아닌가, 정면으로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여중생 사망 사건'도 고씨에게 군대 문제를 더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결국 고씨는 2003년 여름 병역거부자를 후원하는 모임인 '전쟁 없는 세상'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고씨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만나 고민을 나누었고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해서도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정언명제와 군 입대의 현실적 압박 사이에서 고민하던 고씨의 '타는 목마름'을 적셔주는 '샘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면서 그동안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기독교 평화주의를 접했을 때 고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 9월 입영통지서를 받은 고씨는 병역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2년 여 간 고민한 결과이자 "신부님들은 군대에 안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어릴 적 의문을 푸는 순간이었다.
대체복무 희망, 그러나 현실은 '수감'
고씨는 다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마찬가지로 대체복무를 희망하고 있다. "복지 시설에서의 봉사 등 군대나 살상과 관련 없고 평화주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하며 사회에 봉사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그러나 고씨의 이러한 바람이 당장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행법대로라면 병무청은 고씨를 고발하게 된다. 그리고 '관행'대로라면 고씨는 '구속'수사와 재판을 거쳐 통상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 한다.
해방 후 1만명이 넘는 이들이 이처럼 신념의 대가를 감옥에서 치러야 했고 지금도 1186명(2005년 9월 15일 기준)의 젊은이들이 수감돼 있다. 1186명이라는 수치는 현재 전 세계에서 무기 사용 거부를 이유로 수감된 인원 중 90%가 넘는 비율이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한 병역법 개정안이 올초 국회에 제출된 상태지만 입법 과정은 더디기만 하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
또한 "국방개혁·군대 인권 개선과 병역거부권 실현은 함께 이뤄져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고씨의 바람과 달리 얼마 전 발표된 국방개혁안에서도 이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모두 가톨릭 교인인 고씨의 가족들도 이러한 점 때문에 걱정어린 눈으로 고씨를 바라보고 있다. "대개 입영예정일 하루 전쯤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다른 병역거부자와 달리 전 일주일 전에 말씀드렸어요. 부모님은 제 뜻을 이해하시면서도 현행법상 '전과자'가 되는 길이기에 많이 걱정하시죠. 군대에 다녀온 남동생은 제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군요."
가톨릭 전체의 성찰 계기 되려나
걱정하는 가족들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고씨는 자신이 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이 가톨릭 교인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씨는 "미래를 전부 건" 자신의 결정이 군사주의에 물들어 있는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가톨릭 교단에서 '평화'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남은 기간 동안 교우들과 이 문제를 토론할 생각입니다. 가톨릭의 가르침대로라면 교단에서도 적극적인 반대를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가톨릭 교단이 이번 결정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고씨의 결정이 교단 내에서 이미 하나의 '울림'이 됐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24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사)우리신학연구소가 "이 초유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긴급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고씨는 이와 함께 '불구속' 수사를 촉구할 생각이다. "관행적으로 남발되는 구속 수사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게 고씨 바람이다.
고씨는 마지막으로 "두려움에 바탕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국가 이익과 개인 양심 조화시킬 수 있는 입법 필요"
고동주씨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유서
다음은 고동주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유를 스스로 밝힌 글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양심에 따라 병역거부를 하고자 하는 고동주입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로서 대학에 입학해서 가톨릭학생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공부했고, 여러 활동들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내야만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또 그러할 때 진정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에게 들려온 기쁜 소식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원수조차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대상에 제한도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미워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가장 최악의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죽어갔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저에게 군대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부추기는 곳이 군대입니다.
군대는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집단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협할 것이고 그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협을 줄이기 위해 상대방보다 더 강성함을 자랑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군비경쟁이 멈추질 않고 무기생산과 수입에 쓰이는 예산이 늘어나는 대신 국민들의 실질적인 안전과 복지에 쓰일 예산은 줄어듭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간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두려워해야 하고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고 또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군대에서 받을 훈련을 상상해봅니다. 적으로 상정되는 인형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총칼로 찌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훈련을 받겠지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저는 예수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복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버리게 된다면 제 삶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군대에 들어갈 것을 거부합니다. 저는 이미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제 2장 4절에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올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겠지요.
또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사목 헌장에서 전쟁의 야만성 방지에 대한 79항에는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며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달리 인간다운 입법 조치를 취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저는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살고자 군대에 가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아직 합법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근 60년 동안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했고 지금도 1000명이 넘는 수감자가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도 합헌결정과 유죄선고를 내리면서 소수의견으로 입법부의 역할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양심을 조화시킬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군대에 들어가더라도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감옥에서 그들의 시간을 허비시키는 것도 국가적 낭비입니다. 민간대체복무를 통해 저도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국회에서 하루빨리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