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청년인 아버지와 심순옥이 이별했을 항구도시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누추한 골목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야생 고양이들이 밤 뒤에 몸을 숨기고, 가로등마저 깨진 비좁은 골목에서 그들이 나눴을 입맞춤, 서로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빛났을 청춘의 남녀. 어디선가 요란한 기적 소리가 울렸다. 아주 먼 시간의 지층을 관통해 올라오는 듯한 소리. 커다란 화물선의 굴뚝 위에서 연기가 양감과 질감을 지닌 물체처럼 치솟았다. 아니, 영롱하게 빛나는 거대한 거품처럼. 서로 다른 빛깔의 비늘을 지닌 물고기처럼 수면이 팔딱였다. 나의 머릿속에는, 다른 여자를 평생 마음에 품은 남편 대신 아들에게만 집착하는 늙은 어머니도, 침대 위에서 보잘것없이 메말라가는 눈먼 아버지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의 아름다움만이 오로지 나를 사로잡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내가 탄식을 내뱉듯 속삭였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백수린
좋으네..
오랜시간 머릿속에 떠돌던 단어들, 추상으로도 잘 그려지지 않아 어설프게 묘사하던 풍경들이
눈앞에 활자화된 문장으로 펼쳐지는 기묘한 순간에, 가슴이 한껏 고양됐다.
함께하다 언제든 홀연히 떠날지 모를 아픔, 멀리 타지에 홀로 속하지 못하는 고독들..
누구나 어쩌면 한번은, 지나다 몇번은 보게될 흔한 경험일지라도
아주 짧게 빛나는 그 순간에는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신비함을 품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다.
한때는 직접 발화되던 보편적인 현재의 언어들,
시간의 유약을 발라 구워져 종래는 은은하게 빛나는 특별한 노래와 글이 되더라-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