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를 시작하며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가 10,18)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하여 참으로 긴 여정을 걸어왔으며 군사독재시대부터 오늘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뜻으로 이 법의 완전한 폐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국가보안법 폐지의 당위성이 정치권과 각계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 그나마 다행스러웠으나, 최근 여러 정쟁으로 말미암아 그 당연한 뜻이 퇴색되고 혼미를 거듭하는 실정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역사의 책무를 생각할 때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그 제정과정의 불법성에서부터 심각한 폐해와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고, 운용의 실제를 봐도 독재 권력이 자의적인 법적용과 용공조작을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기 위해 사용했던 "악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당한 법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거나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터무니없이 지연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면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북한 핵 위기와 서민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보안법 폐지를 차후로 미루라는 일각의 목소리가 맹위를 떨치는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듭니다. 국가 보안법의 본질은 대외적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대내적 인권의 문제이므로 북한 핵과 같은 국제정치의 여건을 빌미로 폐지 유보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진정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기존의 형법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는 진실이 드러났고, 국민 대다수가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여러모로 현실에 맞지 않는 모순으로 여기는 마당에 유독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세력들이 악법의 존속을 주장하고 나서는 작금의 현상은 이 법이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우선 오랜 세월 동안 무의식 속에서 편견과 증오 그리고 배척의 마음으로만 살아 온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해방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의 영을 매섭게 꾸짖어 쫓아 내주심으로써(루가 4,31-37 참조) 인간의 거룩한 품위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저지른 죄가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범죄에 악용되었던 "수단"에 병적인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더러운 영에 시달리고 있는 치유의 대상입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보수와 진보 혹은 수구 대 개혁 진영간의 다툼으로 볼 사안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건강한 정신과 거룩한 영혼을 회복하여 험난했던 민주주의 대장정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으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 당위입니다. 쓰러졌던 정의를 함께 일으켜 세우며 서로의 존엄성을 되찾아주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그런 연후에 겨레의 화해와 통일은 절로 뒤를 따를 것이니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라!"(시편 85, 13)는 성경 말씀 그대로 우리 겨레는 축복과 경사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상승과 도약의 기회를 맞을 때마다 이를 값지게 쓰지 못하여 더 큰 침체와 불행을 겪게 되었던 안타까운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 국면은 도약과 침체의 갈림길에 와 있습니다. 구악을 단호하게 청산하면 상승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영영 심연의 어둠에 빠지게 되는 역사의 냉엄한 법칙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부디 모든 사람들이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인들이 민족의 밝은 장래를 염두에 두는 지혜로운 결단에서 하나로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겨레의 기쁨과 희망을 준비하고자 오늘부터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염원하는 단식기도에 들어갑니다. 기도 중에 무서운 고난과 억울한 죽음을 겪으신 숱한 의인들을 만나며 오늘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겪고 계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겨레의 통일을 염원하시는 많은 분들이 우리와 뜻을 나누실 것을 믿습니다.


2004년 11월 1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99년 울톨릭 집부를 국보법 철폐 미사와 함께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오랜 단식에 거동도 불편하시면서.. 먼 관악까지 시국미사 집전을 위해 와 주셨던 나 신부님의 짧은 머리가 아직 생생하다.

물론 개인적으론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접은지 오래고, 지금 굴러가는 대체입법이니 하는 나부랭이에 기가 차지만..

어느 국회의원들처럼 쑈같은 다이어트 투정이 아닌, 고난의 가시밭길을 늘 가시는 신부님들을 마음으로나마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