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갔던 길, 그 14개의 처(stations)..
가톨릭은 기억의 종교라고들 한다. 그분의 마지막 만찬, 걸어가신 가시밭길.. 그것을 매번 다시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과정이 미사고, 기도(십자가의 길)니까.
예수의 마지막 수난을 잘 묘사했다던 영화를 보고 사순 십자가의 길을 한지 3개월여만에 다시 그 길을 걸었다. 어둑어둑해지는 명동 들머리에서, 조금씩 흩날리다 멈춘 비와 함께..
그간 더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그 죽음의 현장으로 떠난다.
언제 걸어도 조금씩 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는 길..
아픔이 있다. 피흘림이 있다.
<시작기도>
평화의 꽃물이 들어야 할 봄에
전쟁의 핏물이 고이는 이 참혹한 슬픔을 어쩌지요?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십자가 위에서 고백하신 주님
서로가 형제자매인 이 땅에서
사랑 대신 마음의 총을
용서 대신 복수의 칼을 든
눈 먼 사람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전쟁이 낳아준 공포 속에 우리의 일상엔 곰팡이 가득하고
우리의 얼굴엔 그늘만 짙어갑니다.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욕심의 포로가 된 이들을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우리의 절망과 탄식 속에 들어와
당신이 직접 기도해 주십시오.
평화를 위해 당신은 더 많이 울어주십시오
오오 주님! 이 피묻은 슬픔을 어쩌지요?
- 이해인 <슬픈 기도>
1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심을 묵상합시다.
2000년 전 죽음을 앞두고 피땀을 흘리며 동산에서 기도했던 그 심정으로
지금 다시 기도합니다.
수많은 생명이 죽어갈, 또다른 나의 목숨이 스러져갈 전쟁, 그 참혹한 비극을 앞에 두고
또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
나 하나의 십자가만으로 부족했던 것일까요.
어찌도 이리 탐욕과 이기심, 폭력과 전쟁의 물결은 그치지 않는 것인가요.
하느님, 간청합니다. 이 전쟁의 참담함 앞에서 오직 당신 뜻만을 찾게 하소서.
*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 (노래)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2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다시금 재판정에 섭니다. “모든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처럼, 지금 당신들은 나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한다”고..
하지만 당신들의 입에서 나온 전쟁선언, 파병선언이,
나에게는 죽음이요, 이라크의 내 벗들에게는 사형선고임을,
어찌하여 그대들은 모릅니까.
3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어찌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가.
가진 것, 상처투성이 몸뚱이 하나, 빈 나무십자가 뿐이거늘,
그대는 무엇이 두려워 나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가.
아직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총구, 영문 모를 총탄에 죽어간 소녀의 핏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그 총구를... 어찌하여 다시 또 나를 향해 겨누는가.
멀리서 들리는 탱크와 전투기의 굉음은 또 무엇인가.
십자가 하나 드리워진 이 황량한 사막 위에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들 총포를 쏟아붓는 것인가..
4처. 예수님께서 쓰러지심을 묵상합시다.
꽃 피는 초원에
포탄 쏘지 마세요
꽃 피는 나무에 총 쏘지 마세요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에
총질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는 아기 가졌어요
우리 엄마에게 총 쏘지 마세요
내 동생은 두 살
아직 걷지도 못해요
내 동생에게 총 쏘지 마세요
제발 포탄 쏘지 마세요
전자 폭탄에 친구들이 죽어가요
검은 화염에 친구들이 죽어가요
거센 불길 속에 친구들이 죽어가요
우리가 놀던 골목에 폭격하지 마세요
- 김용택 <꽃 피는 초원에 포탄 쏘지 마세요>에서
5처.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채찍질 당하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짓눌려 넘어지고 깨어진 나를 보고 계십니다.
총탄에 피흐르는 나의 가슴을, 폭탄에 날아가버린 내 두 다리를,
우라늄탄에 일그러진 내 얼굴을.....
그저 끌어안고 울 수 밖에 없는 어머니 당신의 마음은,
총탄과 폭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상처보다 고통스런 피투성이가 되어
한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가슴으로 꺼이꺼이 소리 없는 울음만을 토해냅니다.
6처. 예수님께서 여인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여인들이여, 여인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로할 수가 없다오.
죽어가는 자녀를 품에 안은 그대를,
내 진정 무슨 말로 위로하리오.
들이닥친 미군의 총부리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그대들을,
내 진정 무엇으로 위로하리오.
영문도 모르고 잡혀간 수용소에서 병사들에 짓밟혀진 그대들의 영혼을
내 진정 무엇으로 위로하리오.
이제는 가족들에게마저 부정한 여인으로 버림받은 그대들의 영혼을
도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으리오..
7처. 예수님께서 옷을 벗기우심을 묵상합시다.
그대는 아는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한 벌 옷의 의미를..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무엇을 벗기웠는지..
그대는 아는가. 발가벗기워진 것은 내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당신의 부끄러운 죄악임을...
그대는 왜 모르는가. 전쟁은 공상영화가 아님을.. 전쟁은 컴퓨터 게임이 아님을..
그대는 왜 모르는가. 전쟁은 죽음이요, 파괴임을.. 전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그대는 왜 모르는가. 전쟁으로 인해 당신마저 죽어가고 있음을...
8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나를 못박는 소리가 들린다. 쾅 쾅 쾅
나를 못박는 소리가 들린다. 탕 탕 탕
나를 못박는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총성과 포성이 나를 못박고 있다.
지천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내 영혼을 못질하고 있다.
9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능욕당하심을 묵상합시다.
2000년 전, 내 제자들은 모두 겁이 나 도망갔건만,
2004년, 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한 사람은 내 십자가를 지키고 있구나.
총칼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서 정의를 자유를 외치고 있구나.
내 이름을 앞세워 전쟁과 폭력을 일삼고 있구나.
도망가지 않은 나의 제자가 이제는 나를 능욕하고 있구나.
10처. 예수님께서 용서를 청하심을 묵상합시다.
하느님,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라크 땅, 그 곳에서 자신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느님, 회개하게 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애써 외면하고 있나이다.
눈돌리고 눈감음으로써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신들 마음 속의 탐욕을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깨어나게 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라크, 너무나 먼 곳의 이야기이기에,
자신들의 일상이 너무나 바쁘기에,
간절한 믿음이 부족하기에,
저들은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일어서지 못하고 있나이다.
11처.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 용서하소서. 당신을 외면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열사(熱沙)의 대지 위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당신을,
이라크 땅, 피흘리는 생명들과 함께 죽어가는 당신을,
그 외로운 당신을 외면했나이다.
영화관 속 스크린에 비춰진 당신의 수난에 눈물 흘릴 줄만 알았지
지금 이 땅위에서 죽어가는 당신에게는 고개를 돌렸나이다.
우리가 외면한 자리, 우리가 떠나온 자리, 전쟁과 학살의 땅 이라크로
당신은 오늘도 걸어가십니다.
다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총탄에 짓이겨진 다리를 끌고서
그렇게 그렇게 걸어가십니다.
당신의 죽음 앞에 한 송이 국화꽃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죽음 앞에 우리 자신이 평화의 촛불이 되게 하소서...